본문 바로가기

세계사

서양고대사 고대 아테네의 전성기 참주정의 시작과 솔론

서양고대사 고대 아테네의 전성기 참주정의 시작과 솔론

안녕하세요! 윤쌤입니다~ 오늘은 앞선 서양고대역사의 2번째 파트,

고대 아테네의 전성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고대아테네는 기원전 6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 귀족정체제가 붕괴되어 갑니다.

앞선 시간에 귀족정체제가 확립된 반면 이번에는 그 체제가 붕괴되어 가는군요!

귀족정 체제가 붕괴된 원인으로는 인구가 증가하게 되면서 이들이 살 수 있는

토지가 부족해졌기 때문이지요. 여러분도 알다시피 고대의 경제체제는 농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농사를 지을 비옥한 토지가 필요하였지요.

 

아테네의 법률상 토지를 소유해야만이 아테네 시민으로서 인정을 받게되는 조건을 충족시키기 때문에

아테네의 토지부족현상의 증가는 시민들의 불만만을 크게 야기시켰지요.

아테네에서는 시민들의 불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정복전쟁을 지속하였고,

인근 지역들을 점령하는 것의 한계에 다다르게 됩니다. 결국 귀족들의 땅만 계속해서 넓어지는 상황이

오게 되었지요. 이로 인해서 빈곤층의 빈곤화는 가속화되었고,

이는 귀족정에 대한 불만으로 커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평민층과 귀족층간의 갈등이 심화되었지요.

 

아테네에서는 정복전쟁 이외에도 해외 식민지를 확대하면서 여러 국가들과 교류를 하였습니다.

현재의 소아시아 지역인 Lydia에서는 그리스로부터 화폐가 도입되어서 부의 축적의 척도가 만들어졌습니다.

이제는 생계형 작물에서 상업형 작물로 주산물 재배형태가 전환되었지요.

앞선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기존에는 농업으로 밀과 보리 등의 생계형 작물을 길렀다면

이제는 황금작물이라 불리는 포도와 올리브를 재배하면서 돈의 맛을 알게 되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돈맛을 알아버린 귀족들의 횡포로 인해서 농민들은 그들로 부터 분리되어서

소작을 하는 소작농이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아테네에서는 중갑, 중무장 보병인 호플리테스 Hoplites 와 사각밀집대형인 팔랑크스 Phalanx

가 등장하게 됩니다. 이는 군사적인 전술의 변환으로 인한 등장으로 중농 이상의 시민들이

호플리테스에 합류하였지요. 시민들은 군사권을 행사하면서 귀족정에 불만을 표출할 수 있게 되었고,

전술의 변환 이후로 조직과 단결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결국에는 시민과 귀족이 동등한 위치에 놓이게 되지요.

그리고 시민들의 회의기구인 민회가 실질적인 참정권인 선거권과 피선거권의 행사를 요구하였습니다.

이로인해 귀족정 말기의 귀족들은 민중에 대한 지지를 확실하게 상실하였다고 할 수 있지요.

기원전 7세기 중엽부터 기원전 6세기 말엽까지 아테네의 정치형태는 귀족정의 형태에서

참주정의 형태로 전환되었습니다. 기원전 7세기 말에 킬론 Kylon 이 참주가 되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결국 귀족과 시민간의 갈등만 심화되는 상황을 불러왔지요. 이는 아테네에게 있어

무법과 무질서의 상태를 불러왔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중재하기 위해서 솔론 Solon 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는 양분된 무질서의 상황을 해결하고자 하였지요.

솔론은 참정권의 분배와 경제적인 불균형의 완화를 우선적으로 시도하였습니다.

기원전 594년 아르콘으로 선출된 솔론은 사유재산의 정도에 따라서 참정권을 부여하게 되지요.

이는 금권정치 Timocratia 라고도 부르는 4계층의 계층 분류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제 1계층 : 펜타코시오메딤노이 Pentacosiomedimnoi
제 2계층 : 히페이스 Hippeis, 귀족과 신흥부유층으로 이루어진 계층, 아테네의 고위관직을 독점
제 3계층 : 제우기타이 Zeugitai, 자영농민층으로 하위관직을 차지함
제 4계층 : 테테스 Thetes, 관직을 보유하지 못함, 민회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만 부여

그리고 솔론은 400인 협의회라는 민회의 예비모임을 창설하게 됩니다.

400인협의회를 통해서 시민법정의 권한을 강화하고, 사법개혁을 시도하였지요.

이를 통해 결국 솔론은 아테네 최초의 성문법을 제작하게 됩니다.

솔론의 이러한 행보는 법률의 성문화를 이루어내었다는 점에 있어서 상당한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솔론의 성문법과 별개로 드라콘이 아테네 최초로 성문법을 제작하였다는 주장과

견해를 달리하고 있어 현재까지 대립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이 현재의 논란요지라 할 수 있겠지요.

또한 솔론은 기존 시민들이 가지고있던 부채들을 말소해주었는데요. 인신 저당의 금지와 폐지를 통해

부채관계를 무효화하고 빈곤시민들의 채무 악습을 폐지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시민들의 경제적인 예속을 방지하는 이러한 활약들은 결국에는 노예노동의 필요성을 불러오게 되지요.

시민들을 인력으로 사용하지 못하게되자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인력이 공급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농장주들은 새로운 노동력을 노예에게서 찾게됩니다.

그리고 아테네의 노예무역은 시작되게 되지요.

 

솔론의 개혁은 정치적으로 한계가 있었다는 점을 아셔야 합니다.

그는 결국에는 시민들이 가지고 있던 근본적인 문제점인 토지부족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기존 귀족들의 권한 위에서 행해진 개혁들이기에 시민층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귀족층의 부당한 수탈들에 대해 방지하는 것에 그치고만 소극적인 개혁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이후 기원전 546년에 페이시스트라토스 Peisistratos 가 등장합니다.

그는 빈농층들을 이용하여서 무력으로 아테네의 권력을 장악하였고 참주로써 집권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솔론의 개혁들을 고스란히 계승하게 되지요.

그는 참주가 된 이후로 아테네의 추방귀족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빈농들에게 분배해주었고,

빈농들에게 영농자금을 지원해주기도 하였지요. 상업에도 그는 관심을 두었기에

시민들에게 상업을 장려하면서 흑해를 중심으로한 교역을 활성화 하였습니다.

또한 아크로폴리스 내부의 대대적인 건축 공사를 시행하면서 아테나 신전과 디오니소스 신전의 건축

등과 함께 제전행사를 개최해 아테네 문학의 발전을 꾀하였습니다.

대대적인 건축 공사를 시행하게 되면서 중소 농민들의 몰락을 방지하고 귀족들을 견제하게 되었으며,

시민 공동체 의식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는 아테네 내부의 강화와 유지를 위한 목적이었기도 하지요.

그리고 아크로폴리스 제전을 통해서 희극과 비극의 연극으로 문화형성에 상당한 기여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시민들을 정치로부터 배재하기 위해서 이러한 활동들을 하였다고 전해지는데요.

우민정치를 하였던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경제와 문화적인 측면으로 시민들의 시선을 분산시켜서

정치에는 무관심하도록 만드는 것이 그의 참된 목적이었습니다.

그는 시민들의 참정을 방해하였으나, 결론적으로 그의 집권기동안에 아테네의 정치와 사회, 경제, 문화 분야가

상당히 발전하게된 것은 사실입니다. 

이후 귀족세력은 계속해서 약화되었고 결국에 아테네는 민주정으로 한발자국씩 다가가게 됩니다.

특히나 금권정치와 참주정으로 인해서 민주정으로의 도약을 앞당겼다고도 할 수 있지요.

기원전 510년, 결국 참주정은 붕괴되고 맙니다. 그리고 시민들은 참주의 재집권을 방지하기 위해서

도편추방제 Ostracismos 를 실시하게 되지요.

이는 독재의 실현을 방지하려는 기존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후 여론조작을 통해

정적을 제거하는 등 정치적으로 이용된 제도적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네! 오늘은 간단하게 아테네의 참주정과 솔론, 그리고 페이시스트라토스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요!

알찬 시간들 보내셨는가요? :)

오늘은 이미 밤이 늦은 것 같으니 내일 다시 뵙도로고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수고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